여행길에서...

속초 2박3일 [2013. 11. 4~6.]

淸巖 2014. 1. 22. 20:18

 

올해도 어김없이 속초를 2박3일 다녀왔다.

작년에 다녀온터라 별 볼곳이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볼만한곳을 이리저리 찾아 다녀본다.

영동고속도로를 강릉으로 내려서서 늦은 점심으로  때우고 속초로 향하던중 커피한잔 하려구 잠시들런 카페....

 

 

 

 

 

 

 

 

 

 

 

 

휴휴암(休休庵)...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광진리 1번지

(대한불교 조계종 3교구 본사 신흥사말사)

 

1999년 10월 보름날 홍법스님이 무지개가 뜬 자리를 살펴보니 관세음보살 형상의 바위가 바닷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곳에 암자(묘적전)를 마련하여 세상에 알렸다.

 

 

천개의 눈과 귀로 중생의 괴로움을 모두 듣고 천개의 손으로 중생을 자애롭게 구원한다는 관세음보살님은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웅대한 석재나 불상으로 조각 되어 있지만 휴휴암에는 해안가 절벽에 천연 암반 형태로 편안하게 누워 계신다. 절 이름이 휴휴암이 된 것도 관세음보살님이 바닷가에 편안하게 쉬고 계신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한다.

 

 

볼거리로는 묘적전, 비룡관음전, 황금종각, 지혜관음보살상외에 절 앞 해안 연화대에는 여러 형상의 바위인 발바닥바위, 발가락바위, 여위주바위, 태아바위, 거북바위, 달마바위 등이 있다.

불이문

 

휴휴암은 강원도 양양군 현암면 광진리 1번지로 7번국도 옆에 위치하고 있어 휴가나 강원도 여행시 가끔씩 지나다 들리곤 했던 곳이다. 휴휴암 입구에서 조금 200m정도 지나면 영동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늘과바다사이’라는 펜션에 하루 정도 묵으며 마을 이장님과 어촌계 아시는 분들과 배를 타고 나가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1997년 홍법스님이 묘적전이라는 법당하나로 창건하였고, 1999년 관세음보살 형상의 바위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입소문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님들과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기도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암자이기도 하다.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을 모두 놓고 쉬고 쉰다는 휴휴암(休休庵).

휴휴암은 “자연의 순리로 그 가치를 알고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명의 존중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휴휴암은 온갖 풍파, 모진 세상에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또 쉬면서 기도하는 곳“ 이라고 한다.

 

 

휴휴암 범종각

범종루의 삼천삼백삼십관 관음범종은 현재 사찰에서 사용하고 있는 종으로는 가장 크고 웅장하며, 전체 순금을 입혀 황금종이 되었다 한다. 종을 치면 업장이 소명되고 앞길이 열리며 복이 들어 온다고 한다. 또한 지옥 중생들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종소리를 울려주는 것이라 한다.

 

지혜관세음보살상

 

흥법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 첨만독 천일 철야기도를 드리는 2006년 봄에 바다 절벽 밑에서키가 크고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관세음보살님이 바다에서 용출하신 모습을 친경하고 불사원을 세워 익산에서 나오는 화강암으로 휴휴안 동쪽 끝자락에 보살님 높이 33자 통 돌로 무게 115t 3단 좌대를 합해 총 높이 53자의 지혜관세음보살님을 모셨다 한다.

우측에는 동해해상용왕신, 9용신, 좌측에는 남순동자님을 모셔져 있다.

 

 

지혜관세음보살상에서 바라본 너래바위(연화법당)

 

휴휴암은 임해 사찰로 앞 큰 바다안에 너래바위가 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늘 이곳에서 미역을 따고 드넓은 너래바위에서 말리다가 어느날 우년하 무리지어 노닐고 있는 물고기를 보기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 신기해 휴휴암 주지 흥법 스님께 이를 알렸다 한다.

 

주지 스님은 “관세음보살님도 이곳 바다에서 누워 쉬고 계시는데 하물며 미물도 이곳에서 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하주 보살님을 통해 자비행으로 고기밥을 주기 시작했다 한다. 자비행을 행한지도 여러 달이 지나자 물고기들은 수십마리가 수백마리, 수천마리로 순식간에 떼지어 몰려들어 장관을 연출해 이곳을 찾는 불자님들이나 관광객들이 신기해 한다. 휴휴암에서는 이곳을 연화법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바다에 있는 거대한 너래반석이 연밥같이 파여 있고 파도가 치면 물이 뺑~돌아서 부딪치는 것이 마치 하얀 연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해 이 같이 부른다 한다.

 

 

묘적전

1997년 묘적전을 짓고 법단 안의 나무 먼지를 아무리 청소해도 다 없앨 수가 없었고 법당을 공개할 날이 다 되었는데 스님이 일에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다. 앞바다에 나가서 스님들이 멱을 감고 빨래를 하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 법당안을 살펴보니 그렇게도 없애기 힘들었던 나무가루들과 먼지들이 깨끗하게 살아지고 없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휴휴암의 본전은 묘적전(묘적전)이라 하고 그 안에 천수천안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자대비하신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지요. 관음보살은 인간의 소원을 간구할 때 그것을 들어주시는 부처님의 사자이며, 스스로 부처이며, 삶속의 어머니이므로, 내가 소원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콘도(현대수콘도)에서 바라본 일출...

 

 

울산바위와 신선봉

 

현대 수콘도 전경....

 

좌측 달마봉과 울산바위....

 

달마봉...

 

울산바위...

 

설악산 권금성...

 

 

설악의 마지막 단풍을 뽐내고 있습니다.

 

 

광장에 있는 금강소나무 두 그루도 보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금강소나무는 푸른 솔잎이 파란 하늘 아래 그림처럼 담겨 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 일주문....

 

강원도 사찰에서만 맛볼 수있는 연꿀빵...

 

 

 

 

 

신흥사는 계곡위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왼쪽은 신흥사 절집으로, 오른쪽은 울산바위와 흔들바위로 가게 됩니다.

 

 

설악산 신흥사 서기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자장율사가 향성사(香城寺)로 창건. 향성사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존속하다가 698년에 화재로 소실. 그 당시 9층이던 향성탑이 현재 켄싱턴호텔 앞에 3층만 남아 있음.

향성사 소실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 내원암)터에 중건하고 선정사(禪定寺)로 개칭.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1642년(인조 20화재로 소실. 2년 후 영서, 혜원, 연옥 등 세 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를 얻고 지금의 신흥사를 중창. 절 이름을 신인이 길지를 점지해 주어 흥왕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함.

 
6·25사변 때 고성군 건봉사 전소로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신흥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고 있음. 이에 신흥사의 귀신 신(神) 자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 자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고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절이름을 '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www.shinhungsa.or.kr>

 

 

 

신흥사 사천왕문....

 

 

 

신흥사 보제루(普濟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4호),

 

1770년(영조 46)에 세워진 것으로, 장대석으로 2단 쌓은 기단 위에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은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선방과 요사채로 둘러싸여 있는 마당을 둘러싸 사찰 중심의 영역의 공간성을 확보해 준다. 건물의 하부는 기둥으로만 구성된 열려있는 공간으로 극락보전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진 모습을 보여 주는 보제루 내에는 법고와 목어, 대종, 경판이 보관되어 있고 몇몇의 현판과 중수기가 걸려 있다. 이 중에는 이 사찰이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음을 보여 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호),

 

극락보전은 신흥사 중심 전각으로 1647년(인조 25)에 건립. 극락보전은 극락세계의 주인공인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봉안하는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극락보전은 창건 후 1750년(영조 26)과 1821년(순조 21)에 각각 중수되어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의 크기는 190㎡로서 목조, 와가 이며 원형보존이 잘되어져 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관세음보살과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함께 봉안하여 극락세계의 광경을 나타냈다. 

 

 

 

 

 

 

 

 

신흥사는 설악산의 겹겹이 포개진 산세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안고 있어 산사의 수려한 풍광을 잘 보여주었고, 절집 담장에는 담쟁이덩굴 위로 가을빛도 가득 앉아 있었습니다.

 

 

 

 

신흥사 경내에있는  커피전문점....

커피알맹이.....

 

 

 

 

설악을 나머며 다시한번 권금성을 바라본다...

 

 

 

 

 

 

강원도 양양에 자리잡고 있는 낙산사.

 

낙산사는 사적 제 495호 (2008.12.18 지정) 로 지정된 강원도 양양의 대표 관광지 이기도 합니다.

 

낙산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가,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인 사찰입니다.

사찰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주변에 바다를 끼고 있는 명승지로 관동팔경의 하나입니다.

 

낙산사는 남해의 보리암, 강화의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기도도량으로 불리는 사찰입니다, 이 낙산사에는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고 의상대를 비롯한 명승들도 많지만 그래도 이 곳 낙산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는 동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해수관음상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해수관음상은 낙산사 경내 신성봉 정상에 있습니다.

낙산사는 2005년 4월 5일 양양군 일대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와 발굴조사를 근거로 조선 전기 가람배치의 형태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의상기념관-


2000년 5월에 착공해 1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2001년 5월1일 '부처님 오신 날' 을 맞이하여 개관했다고 하죠.

동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한옥양식의 전시관입니다.

 

 

-홍련암-

 

홍련암은 의상대 북쪽 300m 지점에 있으며 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이다.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상대-


의상대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 수행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팔경' 의 하나로 꼽히며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둘러보는 곳이 바로 이 의상대 입니다.

 

 

-보타락-

 

2층으로 된 누각으로 보타전 앞에 있습니다.
보타락은 관세음보살님이 살고 계시는 보타락가산의 준말입니다.

 

 

무료 국수공양을 받고...

 

 

 

보타전

 

 

 

-사천왕문-

 

2005년 대화재를 견뎌낸 신비한 힘을 지닌 사천왕상을 모신 전각으로
불이 났을 때 사천왕문 좌우의 두 거목이 불이 붙었을때,
사천왕문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 불을 껐다고 합니다.

사천왕문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동졲의 지국천왕.용을 허리띠로 삼은 서쪽의 광목천왕
장검을 들고 있는 남쪽의 증장천왕,보탑과 삼지창을 들고 있는
북쪽의 다문천왕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 혹은 관음전으로도 불립니다.

 

-칠층석탑-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시대 석탑으로 현재 보물 제 4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탑의 상륜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의상대사가 이 탑을 처음 세울 때 3층 이던 것을 1467년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잇어 보물로 지정된 석탑입니다

 

 

낙산사 성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 해수관음상 입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누구나 들러 참배하는 것이

정해진 코스라고 합니다.

 

 

 

 

 

 

하조대

양양 하조대는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암석해안으로,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동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으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은둔하며 혁명을 도모한 곳이라 하여 하조대라 명하였다는 등 많은 설화와 전설이 담겨있는 역사문화 경승지이다

 

 

 

 

 

 

 

 

 

 

 

주문진항

 

주문진 방파제 회센타

 

 

 

 

 

 

 

 

 

 

콘도에서 바라본 속초시내 야경...

 

 

다음날 아침 일출광경...

 

 

 

 

영랑호...

석호인 영랑호는 둘레 약 8km입니다

고성 화진포, 속초 영랑호,  강릉 경포호.....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3대 석호라 할 수 있습니다

영랑호는 속초시 서북쪽 장사동, 영랑동, 동명동, 금호동에 둘러싸인 둘레 8㎞, 넓이 약 1,190,088㎡(36만평)의 자연호수이다.

영랑호라 명명된 것은 신라의 화랑인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주변에는 속초 8경의

하나인 영랑호 범바위가 있어 호숫가에 범의 형상으로 웅크리고 앉아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영랑호 주변(속초의료원 뒤 남서쪽) 산봉우리에 커다란 바위가 여러개 모여 있다. 이를 관음암(觀音岩)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랜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때 어느 도사가 이곳에 수도를 하는 중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득도를 도왔다고 하여

관음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영랑호 변에서는 아득한 옛날에는 화랑과 도사들이 찾아와 수도를 했고 지금은 이름난 궁사들이 궁도를 연마하는 활터도
있으며, 춘하추동 4계절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침이면 수많은 속초시민들의 산책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철새의 도래지로 유명하다. 특히 백조의 무리인 고니떼가 날아와 장관을 이룬다.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는 오리과에 속하는 조류로, 10월 하순에 우리나라에 와서 이듬해 4월 되돌아가는 겨울 철새이다. 고니 외에 청둥오리, 가창오리까지 함께 날아들어 늦가을부터 봄까지의 월동 기간에는 철새의 군무로 장관을 이루는 영랑호변이다.

옛날부터 영랑호는 낭만이 깃든 호수로 이름나 영랑호를 주제로한 시도 많다. 영랑호는 유원지개발 사업으로 둘레 8㎞, 넓이 약 1,190,088㎡(36만평)의 부지에 콘도시설이 일부 건립되었고 9홀의 골프장이 있으며 카누경기장이 있어 심신 수련장소로, 드라이브 코스로, 산책로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이다.

 

 

 

 

 

 

 

 

아바이마을

 

본래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었으나, 수복 이후 피난민들의 거주로 마을이 형성되어 속초리(束草里) 5구가 되었다가, 청호동(靑湖洞)으로 바뀜. 청호(靑湖)라는 이름은 청초호(靑草湖)에서 온 것이 틀림 없다. 청호동(靑湖洞)에는 함경도(咸鏡道)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까닭으로, 함경도(咸鏡道) 사투리 '아바이'를 사용하여 '아바이 마을'이라고도 한다.

 

아바이마을은 강원도 속초에 위치한 작은 어촌마을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호동으로 불리는 아바이마을은 실향민들과 갯배로 이미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몇해 전에는 가을동화라는 드라마로 더 유명해졌답니다. 하지만 아바이마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어려웠던 전후시대를 살아온 우리 부모님들의 고단하지만 억척스런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또, 실향과 분단의 아픔이 아닌 통일과 희망의 삶을 이야기하고픈 우리의 소망이 바로 이 곳 아바이마을과 갯배에 실려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갯배를 모는 모습...